D-4, 월요일
출국하기 직전 비자를 받고 가는 건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마음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고, 이미 임시귀국을 하기로 결정해 두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여유로울 수 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뺴먹은 것이 있다면, 잠깐 한국에 돌아올 때 해결하면 되니까, 하고.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고베대학측 교환학생 담당자로부터 메일이 온 것이었다.
내 COE가 나왔다고. 우리 집 주소로 보내겠다고.
메일을 보고는 한동안 패닉에 빠졌다.
아주 조금의 차이로 서류보다 내가 먼저 출국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루이틀만 더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바로 며칠 전 금요일까지만 해도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더니,
월요일에 갑자기 이렇게 나와버리는 게 어딨어.
순간 비자를 받는 걸 포기했던 내 마음속에선 다시금 욕심이 불타올랐다.
이미 한 번 다시 들어왔다 나가면 돼, 하고 느긋하게 먹었던 마음이 조급해졌다.
눈앞에서는 비행기 왕복권 값이 둥둥 떠다니는 듯 했다.
비자를 받고 나갈 수만 있다면 아낄 수 있는 돈인데.
이 희망고문속에 괴로워하던 내 마음에 다시금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여러번의 심호흡과 따뜻한 코코아,
그리고 볼리비아 경험에서 우러나온 친구의 진심어린 한마디.
그래, 까짓거, 이미 한 번 마음먹은 거 겨우 하루이틀 차이로 못받게 되면 어때.
이미 한 번 포기했던 것인데, 또 한 번 포기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울까.
저녁엔 지난 1년간 영국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고등학교 베프, 꽉을 만났다.
나를 위해 함께 영국에서 날아온 포트넘앤메이슨 잼 두 통과 차이티백도.
바톤터치 하듯, 친구가 돌아오니까 또 내가 떠날 차례.
그래도 떨어져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까.
그 공백을 단숨에 채울 수 있는 사이니까.
D-3, 화요일
미국에서 한 학기동안 교환학생 하다 온 민슈가 나를 위해 천안까지 와 주었다.
대학교에서 만나서 서울 곳곳은 함께 참 많이도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천안에서 만나니 얼마나 신기하던지.
누군가가 내 방으로 저벅저벅 들어온 듯한 기분.
눈도 채 녹지 않은 추운 날 천안까지 내려와줘서 참 고맙고 미안했다.
같이 밥도 먹고, 노래방도 가고, 예쁜 카페에서 몸을 녹이며 이야기도 하고.
시계가 이 날 따라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서 얄미울 정도.
우리 둘 다 떨어져 있는 한 학기동안 열심히 살기.
다시 만났을 땐 꿈꾸던 것과 조금이라도 더 닮아있기.
D-2, 수요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약식이 아닌 full version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날.
아빠 학교 병원이어서 무려 50% 할인된 가격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피도 뽑고, 폐활량이나 시력, 청력 검사도 하고,
비만도도 체크하고, 심전도 검사도 하고, 위 촬영도 하고......에서 해프닝 발생.
위 촬영을 위한 거품약을 먹고 기절한 것이었다.
거품약을 빨리 삼킨 다음, 희고 걸쭉한 약을 한모금 남기고 다 마시라고 지시받은 건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지시대로 입에 딱 한모금만 남기고 약을 다 마신 것도 기억이 나고.
거품약을 삼키면서 너무 괴로워했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떠 보니, 분명 똑바로 서 있었던 내가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었다. 어라.
의사가 내 눈을 들여다 보고 있고, 간호사들이 내 주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뭐가 뭔지 싶은 상황 속에서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깨달았다.
아차, 입에 약 한모금 남겨두라고 했는데 입속에 남아있는 약이 없다. 삼켜버렸나 보다.
근데 알고 보니 삼킨 게 아니었다. 약은 밖으로 토해져 있었다.
의사선생님은 내 위가 남들보다 작은 편이어서,
거품약으로 인해 위가 일시적으로 팽창할 때 온몸의 혈관이 위로 집중되면서
일시적 저혈압이 찾아왔고, 그로 인해 기절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 원리는 이해가 가는데, 그 전제 조건이 아직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 위가 작다니? 난 부페에서도 제대로 본전 뽑을 자신 있는 아이인데...
흠, 결론은, 난 수술도 아니고, 치료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들 다 먹는 거품약 먹고 기절한 여자라는거. (-_-)
D-1, 목요일
출국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난 그저 천하태평.
짐도 하나도 안싸고 있다가 이 날 아침 먹고서야 늦장부리면서
티비로 '성균관 스캔들' 틀어놓으며 캐리어를 열어놓았는데
누군가가 강지연씨 계신가요 하며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었다.
따로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도 없고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비자 신청을 위한 서류가 3-4일만에 일본에서 우리 집에 도착한 것이었다.
출국 전에 받을 줄도 몰랐는데 세상에.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34분.
급한 대로 ktx표를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걸로 예매하고
대충 씻고 아무거나 잔뜩 걸쳐입은 다음 정신없이 빠져나왔다.
광화문에 위치한 영사관에 도착한 것이 11시 34분.
이미 당일 비자 발급은 물건너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9시 반에 비자를 받아볼 수 있는 오후 접수는 1시 반 시작이었으므로
나는 일단 정신없이 뛰느라 헐떡거리는 숨을 가라앉혔다.
그동안 민증과 서류 복사본을 준비하고, 비자신청서를 작성하고,
광화문에서 일하고 있는 용근오빠를 잠시 만나
레더라에서 정말 진하고 맛있는 핫초콜릿 한 잔을 얻어마셨다.
기절도 하고, 계획에도 없던 비자신청에 정신이 반쯤 넘어가 있던 내게
달달한 핫초콜릿 한잔은 특효약이었다.
한시 반이 되기 전에 미리 가서 기다려서는,
제일 먼저 접수창구에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은 천안행의 큰 행복.
천안에 도착해서는 가족들과 시내에서 만나 안경점에 새로 안경을 맞추러 갔다.
아, 근데 안경점에서야 바보같이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내가 임시귀국할 줄 알고 장기간 오픈보다 좀 더 싼 3개월 오픈티켓을 끊어놓은 것을.
급히 인터파크에 전화해서 내일 출국하는 비행기 표 예매가 가능하냐고 물으니
오후 네시가 넘어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꼭 좀 어떻게 안될까요, 라고 하니 담당항공사에 전화해보란다.
JAL에 전화하니 현재 네 자리가 남아있어서 예약은 가능하지만,
항공사에서 직접 구매하는 것은 비싸니까 지금 열어있는 여행사에 찾아가서 끊으란다.
아이폰으로 찾아보니 마침 근처에 하나투어가 있길래 가서 티켓 예매에 성공했다.
아, 비자 신청만 하면 끝일 줄 알았더니 항공권 문제까지 날 애타게 하다니.
그래도 티켓까지 해결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새벽까지 짐을 싸는 것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D-0, 금요일, 출국 당일
드디어 출국.
집에서 바로 공항으로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비자를 받으러 또다시 이른 아침부터 광화문으로 향해야 했다.
9시 반에 열자마자 들어가서는
담당 창구 직원이 커튼을 올리기도 전에 서서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돌려받게 된 여권에는 분홍색 사쿠라가 그려진 일본학생비자가 붙여져 있었다.
내가 너때문에 그간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니......
아, 출국 전에 이렇게 널 받아보게 되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광화문에서는 다시 서울역으로, 그리고 서울역에선 공항철도를 타고 김포공항까지 갔다.
김포공항까지는 6분마다 오는 전철을 타고 가면 겨우 이십여분 정도.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는데 담당 직원의 황당했던 말 한마디.
강지연씨는 비행기 예약이 되어 있지 않으신데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분명 어제 하나투어까지 직접 찾아가 내일 출국하는 비행기 끊어달라고 해서 끊었는데, 예약이 되어 있지 않다니.
알고 보니 이 하나투어 직원이 다음달로 티켓을 끊어놓은 것이었다.
아니, 비자까지 받아보게 되었는데, 비행기 때문에 출국을 못하게 되면 어떡하나.
이 쯤 되니까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이젠 그냥 일본 안가도 괜찮을 거 같아.... 신의 계시일 거야....
하지만 운이 좋았다. 마침 두 좌석이 남아있어
별도의 추가요금 없이 원래 타려던 항공편으로 출국할 수 있게 된 것.
세상 모든 신들에게(있다면) 물떠놓고 감사기도라도 드리고픈 심정이었다. 만세!
그렇게 온갖 드라마를 찍고 타게 된 일본행 비행기는
2시간이 채 안되는 짧은 비행 끝에 나를 간사이 국제공항에 내려놓았다.
오사카 시내에 도착해선 고베에 가기 전까지 두 달 동안 있을 어학원 담당자를 만났는데
세상에, 공부도 하나도 안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바로 레벨테스트라니.
현지에 도착해서도 그저 정신없는 일들의 연속.
다행히 레벨테스트는 그럭저럭 잘 보았다.
1시간이나 준 종이시험지는 금방 풀어냈고,
일본인 선생님과의 인터뷰에도 나름 잘 대답했고.
이 점수면 중급이나 고급인데
고급반은 중간에 들어가면 진도를 따라잡기 어려울 테니
중급반이 어떻겠냐고 해 그러기로 결정.
지금이 중요한가. 7개월 후가 중요하지.
저녁에는 도톰보리에서 예슬이와 도톨이를 만났다.
나는 날 위해 여행까지 와주는 친구도 둔 여자임..... 복받은 사람임..!!!
셋이서 생맥주를 홀짝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데
내가 진짜 일본에 와 있는건지, 서울 어딘가에 있는건지 헤롱헤롱.
암튼, 여기까지가 출국 당일까지 정신없었던 나의 이야기.
실제로 정신없었던 만큼이나 글도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에고고..
일본에서의 이야기도 슬슬 이 곳 블로그에 적어나가고자 한다.
짧은 며칠동안 많이 돌아다니고 사진도 많이 찍어서
벌써 쏟아내고픈 이야기들이 잔득 밀려있다구. :)
'Exchange in Japan > in Osaka' 카테고리의 다른 글
02/19/2011 堀江'Sweet Factory'の'堂島ロール' (0) | 2011.02.20 |
---|---|
Happy Valentine! (0) | 2011.02.14 |
요즘 NambaWalk에서는 (1) | 2011.02.09 |
일본 혼자 사는 재미 (0) | 2011.02.05 |
교토다녀옵니다 (0) | 2011.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