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는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이 느낌 그대로 '필 받아서' 즉시 블로그에 담아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다짐에 그치고야 말았다. 돌아와서 바로 아파서 끙끙댔던 것도 있지만, 그것도 사실 수많은 핑계 중에 하나. 컴퓨터는 거의 매일 켜서 사용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이 쉽게 써지지가 않더라. 그토록 생생하고 즐거웠던 여행인데, 벌써 아득히 먼 옛날같이 느껴졌기에. 낮잠자는 짧은 시간동안 꾸었던, 꾸는 순간엔 달지만 깨고 나면 허무한, 그런 짧은 단꿈같이 느껴졌기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는 것은 늘 이런 식이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굴러가는 일상이라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만화경처럼 바뀌는 여행하고 같을 순 없다. 매순간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려고 돌아다녔던 여행의 나날과는 너무나도 다른, 두문불출하고 이불 덮고 누웠다 앉았다 하는 내 귀국 이후의 날들. 모든 것이 새롭고 충격적인 여행지의 풍경과는 달리, 가구의 배치며 방의 위치, 굴러다니는 물건들 하나하나가 내게 너무 익숙하기만 한 집구석. 이러니 내가 어찌 '감히' 글을 쓰겠다고 함부로 덤빌 수가 있었을까. 어찌 감히 이런 단조로운 일상 속의 내가 꿈같았던 여행에 대해 썰을 쉽게 풀 수 있었을까.

그래도 한 번 했던 약속은 지켜야겠다 싶어 어떻게든 블로그에 남겨두련다.
언제든 다시 꺼내보면서 여행에 대한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기 위해서,
블로그까지 찾아와주는 지인들에게 내 여행의 감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나와 같은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정볼 주고 싶어서
그래서 이제부터 적어나가련다. 백문이불어일견이라고 웬만하면 글보단 사진빨로 간결하게.
(실은 글솜씨가 많이 딸려서.)

아침 8시 55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떠나 두시간 정도의 짧은 비행 후에 도착한 푸동국제공항. 지난번 왔을 때에도 느꼈던 거지만 상해푸동공항은 참 할 것이 없다. 북경공항처럼 비교적 싼 가격에 즐길 식사나 마사지도 없고. 맛있을 것 같은 까페도 하나 없고. 그래도 마침 지난 한 해 동안 두 번이나 중국엘 다녀왔더니 집에 160위안 정도가 있더라. 또 언제 쓸까 싶어서 가져간 중국 돈으로 비싸보이고 맛은 없을 것 같은 카페에서 핫초콜릿을 한 잔 주문했다. 38위안. 맛도 밍밍하고 별로였지만, 겨울 점퍼를 공항에 맡겨두고 온 탓에 추웠기 때문에 그 밍밍한 코코아물의 온기가 고마웠다. 이동시간과 환승 수속시간을 제외하고 한시간 정도의 어정쩡한 대기시간 동안 아껴가며 홀짝이면서 죽치고 있었다. 그전에도 이미 수만번 들여다본 지도를 보고 또 보아가며 계획을 세우고, 김연수의 여행 산문집을 읽으며 그의 문장을 곱씹기도 하고, 되지도 않는 와이파이와 여러번 씨름도 해 보고, 여행의 시작을 앞두고 들뜬 마음을 수첩에 휘갈겨쓰기도 했다.

그리고 환승 후 여섯시간이 넘는 꽤 갑갑했던 비행 끝에 도착한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 내리자마자 후끈함과 습기가 나를 확 안는 느낌. 드디어 지긋지긋했던 추위와 비행에서 벗어나 여행지에 도착한 느낌. 너무나도 설레이고 기분이 좋아서 길고 긴 입국수속 대기시간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수속을 마친 후에는 카오산로드로 가는 공항버스 티켓을 사서 버스에 올랐다. AE2 버스이고 요금은 150밧. 시내까지는 40분 정도의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 동안 옆에 앉았던 (영어를 잘하던) 핀란드 아이와 애기도 하고, 이국적인 바깥 풍경도 구경하며 지루하지 않게 카오산까지 갔다.

숙소에 유진이 도착 전에 먼저 가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고 개운하게 샤워도 하고, 원기충만해서는 바로 카메라 가방 들고 밖으로 나갔다. 위 사진에 나온 건물은 파수만 요새. 내가 묵었던 KC게스트하우스와 같은 도로에 있어서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남의 블로그에서만 봐 오던 Freshly squeezed orange juice! 내가 생각했던 오렌지의 형상은 아닌데 맛은 꼭 오렌지다. 사진 왼쪽에 나온 작은 병이 15밧, 좀 더 큰 병이 20밧. 나는 작은 병을 사다 빨대를 꽂고 홀짝거리며 실컷 거리 구경을 했다. 이처럼 싼 가격에 생과일주스를 마시며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니 진짜 여행이 시작된 기분. 사진 속 형상들이 프레임 밖으로 걸어나와 현실이 된 기분.

람부뜨리 로드. 카오산보다 좀 더 조용하고 멋스러운 거리다. 무엇보다도 조명이 예뻤던 길.

내가 찍었지만 참 잘찍었다, 아니 사진 한 번 참 잘나왔다 싶은 사진.

담벼락을 따라 붙어있던 형형 색색의 아름다운 조명들. 이렇게 조명도 예쁜데다 새해 첫날인데, 문득 혼자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나 자신이 청승맞게 느껴졌달까.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카오산로드!
듣던 대로 없는 것이 없고, 잠들 줄을 몰랐던 거리.
태국인보다도 외국인들이 훨씬 더 많은. 특히 백인들의 수가 압도적인.
수많은 간판들 중에서 태국어 간판은 눈 비비고 찾아봐도 찾기 어렵고 영어로 된 간판들 뿐인.
화려하고 세련된 맛은 없지만,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사람을 들썩거리게 하던 거리.
이 거리만으로 태국을, 방콕을 논할 수 없지만 방콕에 온다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곳.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가 카오산에서 먹고 즐긴 것들, 카오산의 먹거리 퍼레이드

먼저 길거리표 팟타이.

나는 거리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배고프기도 하고 길거리표 팟타이 보기에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길래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이분께 사먹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온갖 소스를 맘껏 얹어먹을 수 있다. 나는 저 중에서 다른 것들은 수상해 보여서 감히 도전해 보지 못하고 팟타이 위에 끼얹을 땅콩과 스프링롤에 곁들여먹을 칠리소스 두 가지만 먹어봄.

계란+야채가 30밧이고 거기에 치킨이 추가된 것이 50밧. 치킨을 먹을까 말까 하다가 그냥 계란+야채 팟타이에 스프링롤 하나(10밧)를 추가해서 먹었다. 면은 고심 끝에 노란색으로 결정. 제일 무난하고 맛있어 보였음.
그렇게 해서 먹게 된 나의 첫 길거리표 팟타이+스프링롤. 스프링롤과 칠리 소스는 너무 맛있었고 팟타이는 너무 짰다. 맛없는 건 아니었지만. 서서 먹기도 뭣하고 무엇보다도 여긴 카오산이니까, 하면서 길거리에 철푸덕 앉아서 열심히 먹었다. 제대로 배낭여행 하는 듯한 느낌에도 취해주고 좋잖아?


다음으로 먹은 것은 카오산에 도착하자마자 먹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바나나 로띠. 그저 뜨겁게 달구어진 팬 위에 기름 들이붓고, 마가린 듬뿍 얹은 후 얇게 펼친 밀가루에 바나나 넣어 부치고, 그 위에 연유 뿌리면 땡인 음식인데 맛있다. 얇은 반죽이 마가린 범벅속에 익혀진 후 적당히 바삭거리는 것도 좋고, 익은 바나나의 식감과 끼얹어진 연유의 달달함도 좋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맛있는데 20밧도 안한다고!

다음으로 먹은 건 후식으로 사먹은 덜 익은 푸른 망고. 사진 속 노오란 파인애플이 더 망고같이 생기고 맛있어 보이긴 했지만, 파인애플은 한국서도 맘만 먹으면 쉽게 먹을 수 있으니까 말았다. 덜익은 망고 도전! 망고 하나 달라고 하니까 노점상 아저씨가 능숙한 솜씨로 쉽게 떼어먹을 수 있도록 칼집을 내어 주셨다. 태국에선 다들 그렇게 먹는지 소금이 들어있는 자그마한 봉지도 함께.
그렇게 해서 먹어본 덜익은 망고는 색다른 경험. 콜라비랑 비슷한 맛이기도 하고.
상큼하다기보단 꼬소한 맛이랄까?

실컷 걷다가 배도 불렀겠다, 좀 더 여유를 부리고 싶어서 사람이 많은 바에 들어가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태국 맥주인 싱하로.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돌아다녔으니 피곤했을 법도 하지. 겨우 몇모금 마셨을 뿐인데 술이 들어갔단 느낌이 났다. 겨우 몇모금인데, 겨우 맥준데.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 노천카페의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저들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을까. 저들에게 이곳은 여행의 시작일까, 중간지점일까, 마무리장소일까, 아니면 삶일까.
근데 의외로 혼자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몇시간만 지나면 숙소서 친구를 만날 수 있으니 다른 여행객들 만나 껴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혼자서 맥주들 들이키며 사람들 구경하고 있으니 살짝 외롭기도 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색다르고 이상한 새해 첫날이랄까. 주로 새해 첫날이면 가족들과 집에서 늦잠도 자고 같이 밥도 먹고 했던 것 같은데.

다시 람부뜨리 로드로. 벌레 팔던 상인! 내가 사진 찍고 난 후 외국인들 몇명이 더 찍으니 노 포토! 라고 외치더라. 그래도 나는 사진으로 남기는 데 성공했도다! 벌레 파는 모습을 보니 왕푸징의 한 노점 같기도 하고.
오징어 팔던 상인! 몰랐는데 마른 오징어를 구워 먹는 것이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가 풍기길래 가서 보니 마른 오징어 구이가 아닌가. 고추장+마요네즈 딥이 순간 그리워졌을 정도로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였다.




람부뜨리 로드의 밤 풍경. 복잡하고 환한 카오산에 비해 이곳은 분위기 있는 조명들 단 식당들과 바가 즐비해 보다 조용하고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너무 예쁘지 않은가?

지치고 피곤해서 밤 열시 조금 안되어서 숙소로 걸어가던 길에 잠시 들린 차오프라야 강변.
이 멋진 다리가 바로 라마 3세 다리.




이렇게 크루즈선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강바람이 너무 시원해서 너무 좋았다.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야경을 만끽할 때의 그 기분이란. 외로움이 조금 가시면서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위의 네 사진들은 다시 숙소로 걸어오면서 찍은 파수만 요새의 사진들. 낮에도 보고 밤에도 봤지만 역시 조명 들어온 밤의 모습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각도마다, 프레임마다 보여주는 모습도 다양해서 사진찍을 맛 나고.

돌아다닌 것보다는 한껏 들떠있느라 소모한 힘이 커서인지, 이 정도 돌아다니고는 급 피곤함이 몰려와서 숙소로 돌아왔다. 10바트짜리 동전 하나 넣고 트위터로 근황 전하고, 방에 돌아와 샤워하고 잠깐 눈 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그 쾅쾅거리는 소리보다 더 크게 나를 찾는 익숙한 목소리. '강지 나야!'

그렇게 반년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난 우리. 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거에 비하면 변한 게 너무 없었다. 말투부터 웃음소리까지 너무 똑같았달까. 이 날 하루종일 내내 혼자서 있다보니 어찌나 더 보고싶고 함께하고 싶던지. 서로 너무 반가운 마음에 피곤함도,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함도 잊고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 너무나도 당연히 바로 옆의 편의점에 가서 맥주 두 병을 집어들었더니 세상에, 술을 안판다는 거다. 우릴 너무 어리게 본건가 싶어 여권 생일날짜까지 보여줬는데 알고보니 태국 법에 따라 밤 12시 부터는 술을 팔지 않는다고. 아니 뭐 그런 법이 어딨어! 하지만 어쩌겠는가. 태국에 왔으면 태국 법을 따라야지. 결국 우리는 맥주 대신 맹물을 함께 들이키며 내일 일정을 대충 얼버무리고 잠에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내일은 이렇게 침대에서 잘 수 없을 테니까. 잘 수 있을 때 편히 푹 자두자고 맥주 못마신 아쉬움을 애써 달래면서.



Posted by 강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