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인 농카이를 지나고부터는 주욱 태국땅이었으므로, 우리는 중간에 내릴 필요도 없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음악을 듣다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언제부턴가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꺠운다. 차 안은 이미 모든 조명이 켜져 환해져 있었으나, 수면안대를 쓰고 자고 있던 나는 그 불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롱거렸다. 아직 많이 자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내려야 한단 말인가 싶어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5시. 분명 카오산에는 7시는 되어야 도착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 꼭두새벽에 무슨 일이란 말인가.
2층 좌석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의 가방들이 버스에서 내려져 길바닥에 철부덕 내려놓아지고 있었다. this is the last stop이라는 말을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이게 어딘데 우릴 이 꼭두새벽부터 내려놓냐고.... 그래도 일단은 버스에서 나가는 것이 급했으므로 좌석에 두고 온 중요한 짐이 없는지 확인하고 부랴부랴 버스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여기가 방콕이고 카오산 인근이랜다. 이 새벽에 어딜 들어가서 동이 틀 때 까지 기다려야 하나...
일단은 카오산 로드까지 짐을 들고 걸어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지쳐있고 좀 쉬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새벽 5시의 카오산은 부적합한 장소였다. 여전히 환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리긴 했지만 죄다 술을 즐기며 노는 사람들. 24시간 카페같은 건 찾으려 해도 못찾겠고... 한 중간정도까지 걸어갔다가 그냥 포기하고 샤워장이나 쓸까 싶어 한인 도미토리로 찾아가 보았다. 역시나 샤워장이 있어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샤워만 하는 데에는 40밧이란다. 세면도구도 없이 딸랑 수건 한 장 주면서 40밧이라니. 그래도 앞으로 24시간을 넘게 씻을 기회가 없으니 씻어두기로 했다. 근데 이 샤워장,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다. 난 한여름에도 핫 샤워를 즐기는 사람인데... (-_-). 그래도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씻고 나니까 개운하기는 했다.
원래 계획은 7시즈음 카오산에 도착하면 조금 쉬다가 9시 이후 여행사들이 열기 시작하면 그 떄 칼립소 쇼를 예매하고 남은 시간동안 놀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난 시간이 5시 반 정도. 그리고 여행사는 왜 몇시부터 연다고 적어놓지도 않는건지..... 몇시간이고 하염없이 도미토리 내의 테이블에서 죽치고 기다렸는지 모른다. 기나긴 버스 여행 끝의 기다림은 어찌나 가혹하던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남은 시간동안 어떻게 할 것인지 대략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유진이는 오후 3시 정도 비행기라 시내에서 약 12시 정도에는 출발해야 했고, 나는 새벽 1시 55분 비행기라(-_-) 아직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12시까지는 같이 활동할 수 있기에 같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까 하고 생각하다가 내가 씨암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카오산에선 어짜피 안가본 곳도 없고, 내 남은 오후 일정 동안에는 씨암 근처에 있는 게 제일 편할 것도 같았으니까. 유진이가 오케이해서 결국 우리는 여행사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저녁에 볼 칼립소 쇼를 예매하고, 그대로 카오산을 떠서 씨암 패러곤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계획도 짜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뭘 할지도 생각해 보다 보니 어느새 동이 텄고, 곳곳에선 조금씩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듯 했다. 기다림에 지치기도 했고 이제 슬슬 한두군데정돈 열었겠지 싶어 나는 친구에게 문 연 여행사가 있는지 둘러보고 오겠다며 도미토리의 대문을 열고 나오는데 드디어! 귀퉁이의 한 여행사가 마침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그 직원에게 뛰어가 칼립소 쇼 티켓 예매가 가능하냐고 물으니 된다고 한다. 만세! 금액을 물어보니 500밧이라고 한다. 분명 어딘가에서 여행사를 통해서 하면 450밧에도 가능하다고 본 기억이 있는데..... 해서 450밧을 불러보니 너무 쉽게 오케이라고 한다. 그대로 티켓을 사고 금액을 지불했다. 아, 방콕을 떠나기 전에 결국 칼립소 쇼를 볼 수 있게 되는구나.
티켓을 구했으니 이제 더 이상 카오산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챙겨들고 도미토리를 빠져나왔다. 씨암행 로컬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땡모빤을 한 잔 더 사마셨다. 바이바이, 카오산. 길지 않은 여행기간동안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한 곳. 내가 이 땅에서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전혀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는 곳. 영원히 잠들 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여 안녕.
그렇게 해서 타게 된 로컬버스는 참으로 '다이내믹'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벼있던 버스 안에 외국인이라곤 딸랑 우리 둘. 아니 그 많던 서양인들이나 다른 동양인 관광객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덕분에 씨암까지 그리 길지 않은 탑승시간동안 현지인들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외국인에게 있어 현지 버스 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하철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노선도가 없는데에다 정류장마다 행선지도 다르니 말이다. 실제로 나도 해외여행을 수없이 많이 했지만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 것 같다. 조금이나마 버스를 이용한 것도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 이동하는 버스 노선 정도.
암튼, 로컬 버스에서 오르자 마자 우리를 반긴건 푸근한 인상의 버스 안내양. 버스 안내양에게 요금을 내고 티켓을 받아야 한다. 요금을 물으니 겨우 14밧. 착한 가격이 감격스러웠다. 만원 버스 안에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타는 나와 내 친구가 현지인들에겐 어떻게 보였을까. 짐을 어디에 둬야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문쪽에 앉은 현지인 아주머니가 짐을 달라며 자기 무릎 앞에 둔다. 자기 앉을 떄 불편할텐데..... 그 배려가 너무 감사했다. 방콕에 대한 인상을 한층 더 좋게 해 준 일.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면서 영어로 된 안내방송 하나 없는 로컬버스에서 나중에 여기가 씨암이니 내리라고 챙겨주기까지 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다시 한 번 고맙다고 하고 싶다 .
사진도 없이 글이 너무 길었다. 이제는 사진들을 조금씩 첨부하도록 할까.
매장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려 자그마한 수색대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엄청 대충 하는 편이라 과연 저 정도의 검문으로 걸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 단, 우리처럼 엄청나게 큰 짐을 가지고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간혹 짐을 열어봐도 되냐고 물어보긴 하더라. 샅샅이 뒤지진 않고, 그냥 한 번 대충 열어보고 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역시 내 관심이 쏠리는 것은 대형슈퍼마켓. 식료품만큼 그 나라의 생활을 엿보기 좋은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얼마 전에 식품 관련 프로젝트 인턴을 했었으니까....
다음으로는 내가 이 매장에서 찾은 한국 식품들(ㄷㄷㄷ)
대충 둘러보고 난 후에 유진이 더 늦기 전에 점심을 먹어야 했기 떄문에 밥을 먹으러 식당을 찾았다. 우리가 이 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간 곳은 MK골드 수끼라는 레스토랑. 엠케이 수끼라는 게 샤브샤브인데, 대충 우리나라 정성본 정도 생각하면 되겠다. 각종 야채나 고기를 넣어서 샤브샤브 해 먹고, 그 뒤에 남은 국물로 국수나 죽을 먹는 것 까지. 근데 워낙 태국에서 유명한 요리라고 하니 한 번 먹어봐야지. 골드가 붙으면 프리미엄이라 좀 더 비쌌지만, 일반 엠케이 매장은 좀 더 걸어야 했으므로 시간이 없는 우리는 그냥 씨암 패러곤 내에 있는 골드수끼로 들어갔다.
야채부터 고기까지 함께 주는 세트메뉴는 꽤 비쌌으므로 우리는 낱개로 몇가지 재료만 선택해서 먹기로 했다. 방콕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낼 줄 몰랐기 떄문에 방콕 돈이 별로 없어요..
이 외에도 양배추랑 녹색 국수를 시켜서 나름 배불리 먹었다. 낱개로 조금만 시켜서 배가 안차면 어쩌나 싶었는데, 고소한 육수랑 계속 먹으니 다 먹고 난 뒤에는 배가 차 있더라.
다 먹고 나서는 유진이와 헤어져야 했다. 씨암역까지 데려다 주는데 어찌나 아쉬운지. 우리 이번에 헤어지면 다음엔 또 언제 보게 되는 거니. 여름이나 되어야 겨우 볼텐데.
너무나도 꿈같았고, 망설임 없이 적어도 지금까진 생애 최고였다고 꼽을 수 있을 이번 여행. 이번 여행이 이렇게까지 즐겁게 추억될 수 있는 것도 다 유진이와 함께였기 때문인데. 멋진 장소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식당에서 맛있는 것 여럿 시켜 나눠 먹기도 하고, 내가 놓친 것도 덕분에 다시 보게 되고, 여행을 하면서 스치는 생각들도 함께 나눌 수 있었기에 그 즐거움과 감동은 배가 될 수 있었는데. 그저 믿기지 않아서 아쉬운듯 악수나 하며 멍하니 있는데 유진이가 살짝 운다. 아, 아쉬웠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여름에 일본에서 한번 보자며 뒷모습이 사라질 떄 까지 손을 흔들다가,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방콕에서의 열두시간 동안은 순전히 나 혼자 보내야 한다. 동시에 그 열두시간은 여행지에서 남은 마지막 시간이기도.최대한 알차게 보내야 후회가 남지 않으리라.
마침 여행객들이 꼭 가본다는 명소 중 하나인 짐 톰슨 하우스가 씨암패러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며 그곳에 먼저 가 보기로 했다.
짐 톰슨 하우스에서부터는 다음 포스팅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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