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09. 4. 4. 16:55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열번도 넘게 본,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1)~(3)까지 모두 내가 영상예술의 이해를 들으면서 썼던 레포트. 부족한 글이지만 글을 쓰면서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에, 내겐 소중한 글이다. 다시 찾고 싶었는데 우연히 발견해서 또 잃어버리기 전에 여기다 올린다. )

영화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금의 시점에서 이야기로 교차편집 기법을 통해 들려주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특히 그 장면들은 주로 마츠코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타난다. 동생 쿠미에게 사에키 선생과의 일을 들려주는 것이나, 교도소에서 교관에게 시마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그 예이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동화를 연상시킨다. 결국 마츠코는 예쁜 동화 속 여주인공과 같은 삶은 현실에서의 사랑을 통해 꿈꿔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곳곳에서 마츠코의 일생을 동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사와무라의 ‘여자라면 누구나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그런 예쁜 동화를 동경하는 법이라구.’ 란 대사는 관객들에게 마츠코가 동화같이 멋진 사랑을 꿈꿔왔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예쁜 꽃들이 만발한 판타지적 배경들, 애니메이션 새들 또한 사랑에 빠진 마츠코의 동화속 여주인공 같은 심정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환상적 동화의 풍경들은 잔혹하기마저 한 현실과 대비된다. 동화를 꿈꾸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일생은 마지막까지도 환상을 허락하지 않고 ‘급’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남은 희망을 글어 모아 미용사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명함을 주우러 갔다가 동네 어린이들에게 마지막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맞아죽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늘 혼자였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한 쿠미를 더 애지중지하시는 아버지로부터 외로움을 느꼈고, 수차례의 사랑을 했으나 매번 버림받았으며, 생일에는 혼자 쓸쓸히 카페에서 직접 산 조각 케이크로 자축해야 했다. 영화는 또한 마츠코가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들어가서는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여준다.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은 원래 돌아온 사람을 맞아주는 사람이 방 안에 있어야 제대로 성립하는 말이다. 하지만 마츠코에게 그 말을 되받아서 ‘어서와’ 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죽는 날까지 철저하게 혼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녀 개인의 삶은 비참하고 슬픈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녀의 존재는 여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사와무라는 교도소 안에서 흐트러짐이 없는 마츠코를 보고 희망을 얻었으며, AV여배우로써의 삶을 시작하면서 겪은 수치심을 마츠코에게서 위로받는다. 그리고 방탕한 백수생활을 하던 쇼 또한 자신의 고모였던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남들에게 따뜻하고도 사랑스러웠던 그녀의 과거 모습에 위로받는다. 영화가 점점 진행되어 갈수록 마츠코와 쇼가 한 프레임에 자주 같이 담기는 것은 - 실제로 죽은 마츠코가 살아있는 쇼와 같은 프레임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쇼가 마츠코의 삶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고모에게 애정을 갖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쇼와 마츠코의 연결성은 사와무라의 ‘어딘지 모르게 마츠코를 닮았는걸’ 이라는 평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마츠코란 존재의 의미를 어느 무엇보다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단어는 ‘신’이다. 비록 자신은 상처투성이에 버림받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져버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기분을 맞춰드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남자들에게서 사랑받기 위해 그 남자가 원하는 대로 맞춰서 살아간다. 돈을 꿔오라면 돈을 꿔 오고, 함께 미용사로 살고 싶어 미용기술을 배우고,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야쿠자를 말리지 않는 것이 그 예이다. 그야말로 자신을 내던지고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가며 상대방에게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다. 철저히 타자 지향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의 전형인 것이다. 이러한 마츠코의 신과 같은 캐릭터는 류의 말을 통해서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성경구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자가 신이라면, 마츠코야말로 진정한 신이라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의 ‘근원어’라는 개념에서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데에는 나-그것, 나-너의 두 가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전자의 경우가 이해 타산적이고, 물질적, 객관적 관계라면 후자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치고 기울여야만 맺을 수 없는 진정한 ‘관계’이다. 신과 나의 관계는 이 중 후자인데, 다른 모든 ‘관계’들을 포함하는, 영원한 궁극적 관계이다. 마츠코야 말로 신과 같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어가며 남을 사랑한 존재였다. 그녀는 진정한 나-너의 관계를 꿈꾸며, 자신 또한 남에게서 그러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왔던 것이다. 비록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녀와는 달리 그녀를 나-그것의 관계로 ‘대상화’하여 매번 버림받고 상처입어 왔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남을 용서하고, 또 사랑해주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궁극적 사랑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충분히 ‘혐오’스럽다. 집에서는 동생에게 치여 제대로 사랑받기 못하고, 커리어는 중학교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에서 호스티스라는 밑바닥까지 추락해 버렸으며,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매번 버림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른, 암울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 속으로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바라보면, 그 안에는 넘치는 희망과 사랑, 그리고 꿈이 있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개구리 소년처럼,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에 대한 기대를 먼저 져 버리지 않고, 매번 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남에게 전파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마치 남을 깨끗하게 닦아줄수록 자신은 점점 너덜너덜해지고 더러워지는 걸레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은 다른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사랑스럽고, 빛나고, 멋지다. 쇼가 말한 대로 인간의 삶이 남에게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닌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느냐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라면, 마츠코의 삶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었으니까.


Posted by 강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