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09. 8. 30. 09:06
(사진은 2007년 제1회 충무로국제영화제에 자원활동가로서 참여했을 때의 사진. 발대식날... 저 땐 머리가 길었었지)

대학교 새내기였던 2007년. 충무로국제영화제는 내게 있어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이전의 나는 나름 영화를 좋아하고, 자주 본다는 아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예술영화 상영관이 없던 천안에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영화들은 기껏해야 대중영화들밖에 없었다. 그러다 서울에 와서 본 예술영화라는 새로운 영역은 정말이지 새롭게 눈을 뜬 것과도 같았다. 영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증폭되었고, 사춘기때만큼이나 unstable했던 시절의 감성과도 맞물려 시너지효과를 낳았다. 그러다가 부천국제영화제에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기 위해 갔을 때, 나는 곳곳에서 진행을 돕던 자원활동가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저들은 단순히 영화의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두 팔로 휘젓고 발을 담그며 참여하고 있구나. 나도 해보고 싶어 !
그러다 마침 충무로국제영화제 자원활동가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고, 인터넷서류접수, 면접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티켓팀 자원활동가로 뽑히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지하철로 삼십분이 걸리는 곳까지 오고 가는 것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첫 영화제다 보니 시행착오로 인해 매우 불편했던 티켓부스의 구조상 온종일 서있다 보니 두 다리엔 매에 맞은 듯 시퍼런 멍이 들어버렸다. 또 끔찍했던 건 하루가 끝나고 영수증과 현금 정산을 해야 했던 것. 틀리면 그 수많은 걸 다시 세야 하는 거다 !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도 미화되었을 정도로 내게 충무로의 추억은 소중하게 박혀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라는 문화의 한복판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영화제가 내게 안겨준 것은 사회적 경험이었다. 집이나 학교의 인맥을 벗어나 내가 한 사실상 최초의 사회생활이 아닐까. 보다 큰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영화'라는 공통분모 아래 모여 함께 크나큰 축제의 장을 만들어나간다는 느낌...... 그리고 제 1회였다는 것도 더 큰 의미를 주었다. 앞으로 성장과 변화과정을 흐뭇해하며 지켜볼 것이 생겼으니까. 최초의 순간을 함께한다는 묘한 기분.


그리고 2009년 올해, 나는 관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올해로 3회차를 맞이하는 충무로국제영화제의 축제의 장은 더 커져있었다. 강북 시내 곳곳을 돌아다닐 때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홍보물과 안내표. 더 다양한 영화들.
내가 본 것은 올해 미국에서 개봉해 인기를 끌었으나 아직 한국엔 소개되지 않은
'Love N Dancing' 이란 스윙댄스 영화였다. 스토리, 작품성 기대없이 스윙댄스 '쇼'를 본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그리고 즐겁게 관람했다.

(사진은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영화를 본 곳은 내가 일했던 대한극장에서였다. 뭔가 또 의미부여 고고싱)

더 인지도도 높아지고, 성장한 것 같아 자식이 자라는 걸 보며 흐뭇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찡하고 좋다. 영화제만큼이나 지난 2년동안 나도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자라났다. (아직 그 성장의 방향성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선 확신이 없다마는) 앞으로도 많이 발전했으면 좋겠다. 다음번에도, 또 그 다음번에도 관객으로서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덧,
올해는 자원활동가 티가 빨간색이어서 실망... 분홍색이 원래 상징이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ID CARD도 사이즈가 작아져 있어서 신기했다.
Posted by 강지님
영화2009. 8. 27. 15:28


영화를 보고 나서 든 느낌은 이거다. '천재의 장난'
(역시 폴 토마스 앤더슨..)

뛰어난 색채감, 주인공의 감정이라던가 상황에 딱딱 들어맞는 음향효과들과 ost, 탁월한 빛조절. 정말 이 감독은 자기가 가진 것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천재 감독과 그의 능력도 그에 걸맞는 배우의 연기가 함께 어우러져야 살아나는 법.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애덤 샌들러의 연기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그저 코미디 배우라고만 생각하고 이전엔 과소평가했던 배우였는데, 이 영화를 보니 생각이 싹 바뀐다. 이전에 내가 봐 온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의 실없는 이미지도 온데간데없다. 앞으로는 눈여겨봐야 할 듯.

캡처한 몇 장면으로 짤막하게나마 느낌을 적으며 글을 맺고자 한다.



영화에는 유난히 달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달리면 호흡은 거칠어지고, 심장박동수는 증가한다(obviously....). 달리는 행위는 간절히, 누구보다도 더 빨리 도달하고 싶은 곳이 있을때나 혹은,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간절히 벗어나고 싶을때 주로 성립한다. 감독은 이 행위를 영화에 적극 활용한다. 누구에겐 별 것 아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나는 여기서 역시 앤더슨, 하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색을 잘 쓴 영화라고 했는데, 이 장면이 바로 그 중 하나이다. 누가 봐도 촌스러운(도대체 누가 저런 옷들을 제 돈 주고 사 입을까 싶은) 새파란 양복과 새빨간 드레스이지만, 영화에서는 일종의 상징으로 쓰여져 시각적으로 더욱 강렬한 효과를 가져온다. 그 남자(=파랑)와 그 여자(=빨강)가 만나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둘 다 그냥 평범한 검은색 양복이라던가 흰색 블라우스를 입었더라면 이 장면이 그닥 기억에 남지 않았을 거다. 그건 너무 ordinary하니까.


영화에서 최고로 로맨틱했던 장면. 사업차 왔다는 것은 '개구라'고... 오직 그녀만을 위해 하와이까지 찾아간 배리 이건.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묵던 하와이의 호텔에서 재회하는 장면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두 사람만은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다. 두번째 스틸컷은 사람들이 다 지나간 후 둘만이 남은 모습.
우선 처음으로 감탄했던 것은 바로 실루엣 처리.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 모습은 하트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실루엣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트로 보이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굳이 두 사람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을 스쳐지나가게 만든 것도 사랑에 대한 무언가의 느낌을 주고 싶어서였을 거다. 내 경우엔 사랑이 바로 저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 세상 그 어느 무엇도 그, 또는 그녀보다는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것. 살아가면서 수없이 스쳐지나가고 놓치는 인연들 중에 그 사람만은 붙잡아 내 옆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끌어안아주고 싶은 것.
Posted by 강지님
영화2009. 4. 4. 17:08

11)상수에 빠져죽으려고 물 안으로 들어갔으나 상류의 취수장이 막혀서 수면이 낮아 죽으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 때 지나가던 남자와 만나게 되는데, 카메라는 남자를 쳐다보는 마츠코를 하이앵글을 통해, 남자의 모습을 로우앵글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마츠코가 이 새로운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 남자를 올려다보는 마츠코의 얼굴을 화사하게 처리된 것도 새로운 사랑에 대한 복선이다.

12)교도소에서의 생활도 호스테스 시절을 보여줄 때와 같이 한 노래에 대한 뮤직비디오인 것처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교도소 안의 사람들이 일어나고 밥을 먹고 다림질을 하는 동작이 정확히 일치하게 함으로써 규칙적이고도 단조로운 교도소에서의 생활을 극단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마츠코 또한 기계적인 삶에 맞춰가면서 점점 희망을 잃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 사랑했던 남자를 기억해내고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부른다. 이 때 어둠 속에 있던 마츠코의 얼굴을 다시 화사한 빛을 받은 것처럼 처리됨으로써, 마츠코가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는 마츠코의 얼굴을 하이앵글로 찍음으로써 마츠코가 다시금 어떠한 ‘목표’를 향해갈 것임을 알려준다.

13)쇼가 있는 죽은 마츠코의 아파트에 형사들이 찾고 있던 사진 속의 남자가 나타난다. 쇼는 이 남자와 대화를 하게 되면서 이름을 묻게 되는데, 남자가 ‘내 이름은-’하고 뜸을 들이는 동안 화면은 과거 뒷골목의 남자를 보여주고, ‘류 요이치입니다’라는 답변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답변을 듣는 과거의 마츠코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는 쇼의 질문에 대한 남자의 답변과 과거에 있었던 류와 마츠코의 재회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14)영화에서는 마츠코가 사랑하는 사람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두 번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꾸민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아름다운 달빛 아래 오솔길을 마츠코가 걷고 있고, 환한 보름달에는 마츠코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드러내는 데 굳이 판타지적인 기법을 활용한 것은, 사랑에 대한 환상과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꿈을 꾸는 마츠코의 심정을 효과적으로 나타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5)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교차편집은 교도소에 수감된 류와 류의 출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마츠코의 모습을 번갈아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류와 마츠코가 독백으로 심정을 말하는 것을 한마디씩 교대로 보여주는데, 두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서로 대조가 되면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둘 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마츠코는 류를 기다리는 것을 택하는 반면 류는 마츠코를 떠나는 것이 그녀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렇게 같은 화제에 대한 두 사람의 대조되는 결론은 교도소 내부의 어두운 푸른빛과 마츠코가 지내는 방의 따뜻한 분홍빛의 색채대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또, 교도소 바닥에 앉아 조그마한 창 너머의 달빛을 바라보는 류의 모습을 비춘 다음, 그런 류의 모습이 서서히 페이드아웃 됨과 동시에 둥근 보름달이 페이드인되어 나타난다. 이윽고 그 달도 페이드아웃이 되면서 화면은 역시 창 밖으로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 마츠코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장소에 있는 두 사람이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교차편집과 디졸브를 통해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16)류가 출소하는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카메라는 류에게 건네주려고 마츠코가 준비한 붉은 장미꽃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 다음, 그 꽃다발을 들고 기대하며 류를 기다리는 마츠코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류는 마츠코를 때려눕히고 도망치게 되고, 눈 속에 얼굴이 파묻힌 마츠코는 코피를 흘리고 울먹이며 고개를 든다. 희망과 설레임의 상징이었던 장미꽃의 붉은색이 버림받은 슬픔과 절망감을 드러내는 코피의 붉은색으로 의미가 전환되는 것이다.

17)류가 두번째로 수감되었을 때 신부로부터 성경 구절을 들으며 자기 자산의 경우로 적용시켜 보는 장면 또한 교차편집이 쓰인 곳이다.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며’라는 문장을 교도소에 곱씹는 것을 보여준 다음에는 자신을 안아주던 과거 마츠코의 모습을 비추고, ‘그리고’ 와 ‘사랑한다’란 구절을 되뇌인 다음 또한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기억 속 마츠코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렇게 성경구절과 그에 대응하는 마츠코의 모습들을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류에게 있어 신은 ‘마츠코’였다는 결론을 쉽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18)형사들과 마주치게 된 류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츠코를 죽였다고 주장하면서 시비를 걸고, 형사들과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물 위에서 시작된 싸움은 허리까지 차는 강 속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물 속에서 계속 벌어지게 된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쇼트를 통해 순간 멍해져서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류의 얼굴을 보여준 다음, 과거 중학교 시절 류가 강 속에서 싸움 도중 마츠코가 탄 배와 마츠코를 바라보던 장면을 이번에도 똑같이 딥포커스 기법과 뒷모습의 흐릿한 처리로 재현한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류의 뒷모습이 중학생 류가 아니라는 것과 마츠코가 탄 배의 모습이 실제가 아닌 환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관객들에게 류가 예나 지금이나 마츠코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과거에 싸움을 멈추고 넋이 나가 마츠코를 바라보다가 공격당했던 어린 시절 류와 같이 지금의 류도 곧 형사들과의 싸움에서 질 것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19)쇼는 강가에서 아버지와의 전화통화로 인해 자신이 과거에 마츠코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마츠코를 만난 적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놀란 쇼의 얼굴을 클로즈업쇼트를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고, 그 다음으로는 쇼의 시선을 따라가며 쇼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강변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마츠코의 뒷모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쇼는 멍하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서히 마츠코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드디어 인기척을 느낀 마츠코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 뒤에 서 있는 사람은 현재의 쇼가 아닌, 어린 시절의 쇼다. 즉, 이 장면은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 - 과거의 마츠코와 현재의 쇼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 -을 통해 쇼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주고 있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쇼와 마츠코가 실제로 만났었던 과거의 장면으로 시간전환을 하는 것이다.

20)자신의 고향에 있던 강과 비슷한 강이 있는 곳에 무작정 내려 정착한 마츠코가 ‘이제 아무도 믿지 않아’라며 석양의 노란 꽃밭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노란 꽃밭의 이미지는 밝지만, 시간적 배경이 ‘석양’이라는 것에서 이젠 시들해져버리고, 더 이상 사랑에 대한 희망과 환상을 품지 않기로 결심하는 마츠코의 심정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이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마츠코가 꽃밭을 ‘절뚝거리면서’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예전처럼 들떠서 깡충깡충 뛰지 않는 모습은 그녀의 절망감과 포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어준다. 꽃밭을 가로지르는 것은 동시에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그 바로 다음 장면에 예전의 모습과는 다른 더 초라해진 마츠코가 나타나도 관객이 놀라지 않고 바로 시간이 지난 후의 마츠코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1)히카루 겐지의 답장을 기다리며 마츠코는 봄에 자신의 우편함을 열어본다. 그리고 카메라는 우편함 안에서 우편함 안을 들여다보는 마츠코의 모습을 클로즈업쇼트를 통해 비춤으로써 답장이 없음에 실망했다는 듯 눈꺼풀을 내리는 얼굴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카메라의 위치는 우편함 안에서 우편함 밖으로 다시 이동하여 마츠코가 우편함 안에서 눈을 떼고 다시 우편함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때 배경은 어느새 여름으로 탈바꿈한 상태이다. 편집을 통한 봄→여름의 시간적 도약을 압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오랜 기간동안 답장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22)마츠코가 죽은 이후 카메라는 들판 위에 널브러져 있는 마츠코의 모습을 비춘 다음, 크레인 쇼트를 통해 서서히 위로 올라가 들판 위의 마츠코가 점점 작게 보이게 한다. 이윽고 카메라는 들판에서 하늘로 시선을 옮기고, 다시 수면으로 내려가 빠르게 수면 위를 움직이면서 마치 배를 타고 물 위를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며 많은 거리를 이동한다. 그 다음에는 물가를 익스트림 롱 쇼트를 통해 찍음으로써 그곳이 영화 전체에 걸쳐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던 그 강가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과거 강가에서 있었던 일을 단편적인 컷을 통해 보여준다. 카메라의 이와 같은 ‘여정’과 같은 이동과 단편적인 컷의 모음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난 마츠코의 삶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고, 그녀의 삶이 제목처럼 과연 ‘혐오스러운’ 것이었는지 스스로 해답을 내릴 수 있게 한다.

23)마츠코의 삶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지나고 카메라는 다시 마츠코의 집을 비춘다. 그리고 과거에 그녀가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아야만 했던 빛이 나는 쿠미가 있는 방으로 걸어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때 카메라는 흰 양말을 신고 한 계단씩 오르는 그녀의 발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한 발에 한 칸씩 오르던 발은 어느새 살짝 작아져 한 발을 먼저 계단에 올리면 나머지 발도 그 계단에 올리는 식으로 깡충깡충 오르는 발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그 발의 주인공을 보여주는 데, 이 때의 마츠코는 젊은 시절의 마츠코가 아닌 어린 꼬마 때의 마츠코이다. ‘흰 양말을 신은 발’을 통해서 연결성 있는 화면전환을 한 것이다.


Posted by 강지님
영화2009. 4. 4. 17:03

1)카와지리 마츠코의 시체 발견 소식을 보도하는 신문기사를 비춘 다음, 그 위에 검은 ‘무엇인가가’ 던져지는 모습을 보여주어 잠시 화면 전체를 어둡게 처리한 다음, 죽은 마츠코의 방 안에서 그 기사가 담긴 신문지를 포함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화면전환을 하고 있다.

2)쇼가 여자친구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장면에서 ‘앞으로 뭐하고 살 거야?’라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쇼가 직접 그 자리에서 대답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후로 백수로 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교차편집기법을 통해서 보여준다. ‘과거에’ 헤어지자는 장면에서 이어지는 여자친구의 말을 보여주면서, 교차편집을 통해 헤어진 후 시간이 지난 ‘현재’ 클럽에서 춤추고, AV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를 찾는 쇼의 모습을 마치 여자친구의 말에 대한 답변처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즉, ‘헤어지고 나서는 지금은 그냥 춤추고 섹스비디오 보면서 살고 있는’ 쇼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벼랑 위에서 물로 몸을 던진 쇼가 가라앉아가는 물 밑에서부터 하이앵글로 햇빛이 물 속을 뚫고 들어오는 수면쪽으로 올라가고, 이윽고 수면을 뚫고 나와 물 밖의 노을빛 하늘을 화면 가득 담는다. 그리고 화면 가득 담긴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을 보여주고, 그 새들이 무리를 지어서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 반시계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비춰준다. 그와 동시에 화면도 반시계방향으로 돌며 그 새들이 날아가는 석양의 강가를 비추면서 자연스럽게 그 강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어린 마츠코에게로 전환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 공간의 화면전환을 하는 것이다. 이 때 쇼트는 강가 전체를 비추는 익스트림 롱 쇼트에서 점점 마츠코라는 인물에게로 클로즈업 되면서, 마지막에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하나의 장치로 작용하는 마츠코 특유의 표정을 클로즈업 쇼트로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츠코 특유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흑백사진으로 변하는 또 하나의 화면전환이 이루어진다.

4)죽은 마츠코의 아파트 창가에서 형사가 쇼에게 마츠코가 원래는 중학교 음악교사였다고 말해주는 장면에서 과거에 마츠코가 음악교사로 있을 때 불렀던 음악이 작게 배경음악으로 깔리기 시작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과거로 화면전환이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화면은 쇼와 형사가 이야기하고 있는 아파트 건물 전체와 그보다 더 앞에 놓인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기운 빨래걸이용으로 걸린 수평의 나무막대기 두 개를 보여준 후, 디졸브 기법을 통해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어가는 두 개의 나무막대기가 놓여있던 자리를 비슷한 모양의 유리창틀로 바꿈으로써 자연스럽게 과거 마츠코가 있었던 중학교 건물의 유리창을 보여주게 된다.

5)마츠코가 중학교 음악교사로 일하는 시절 강 위에서 배를 타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모습을 싸움을 하다 말고 바라보는 중학생 시절의 류 요이치의 얼굴을 살짝 클로즈업 쇼트로 보여준 다음, 마츠코가 탄 배 위를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마츠코가 탄 배가 화면 뒤쪽에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류가 화면 앞쪽에 있는 딥포커스 기법을 활용하는 동시에 화면 앞쪽에 있는 류의 모습을 오히려 더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류가 자신이 싸우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마츠코에게 열중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알려준다. 바로 이어지는 류의 넋이 나간 얼굴의 클로즈업쇼트 또한 류가 마츠코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6)류가 훔친 돈 문제로 일이 꼬이고 꼬여 교감에게 가슴을 보여준 이후 혼자 어두운 연못가에 서 있는 마츠코의 뒤에서 마츠코를 좋아하는 사에키 선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화면은 소리가 들린 어둠속을 보여주고, 반짝 하는 조그만 불빛이 어둠속에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여준 다음, 사에키 선생님이 씩 하고 웃는 모습을 클로즈쇼트로 보여줌으로써 그 불빛의 정체가 사에키 선생님의 치아가 반짝이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사에키 선생님을 대표하는 것이 그 반짝이는 치아임을 고려하였을 때, 수치스러운 일을 겪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 마츠코에게 있어 사에키 선생님의 존재와 그와의 사랑이 어둠속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편집기법을 통해 연못가에서의 사에키 선생님과의 대화 장면과 그 날 있었던 일을 여동생 쿠미에게 이야기해 주는 장면을 비춰줌으로써 사에키 선생과의 일을 관객에게 두 번 들려주는 번거로움 없이 한번에 해결하고 있다.

7)마츠코가 7살 때 병약한 여동생 쿠미를 편애하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후 마츠코에게는 가방만을 매정하게 툭 던져주고는 쿠미에게 줄 선물을 들고 쿠미가 있는 방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카메라는 계단 아래에 서서 계단을 올라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는 마츠코를 계단 위에서 하이앵글로 비춤으로써 사랑받지 못하는 마츠코의 처지를 나타내 준다. 그리고 이어서 계단 위를 올라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로우앵글로 비춤으로써 아버지의 애정이 마츠코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아버지가 들어가시는 계단 위의 방이 환한 빛으로 처리된 것 또한 이를 부각시켜준다. 하지만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닫는 모습을 비춘 다음 다시 계단 아래의 실망한 마츠코의 얼굴을 클로즈업쇼트로 보여주고, 방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마츠코의 얼굴이 어둠속에 잠기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힘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8)아버지가 쿠미에게 남자 이야기를 했다고 화를 내시자 울컥한 마츠코는 ‘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뛰쳐나가 사에키 선생님을 만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돈 문제로 인해 사직서를 강요당하고 인생이 끝나버린 것 같은 절박한 심정에서 이번에는 똑같은 길을 ‘대낮에’ 자전거로 달리며 가출을 하게 된다. 똑같은 길이 사랑이라는 희망과 실직과 가출 후 점점 더 망가지는 삶을 향해 가는 길로 그 의미가 극명하게 대조되며, 이는 밤과 낮의 대조를 통해서도 드러나게 된다.

9)세 번째 애인인 오카노에게까지 버림받은 이후 마츠코는 혼자 방에 남겨지게 된다. 이 때 마츠코가 과거에 겪었던 장면들과 마츠코가 ‘왜!’라며 방안에서 절규하는 장면을 교차편집을 통해 번갈아 보여줌과 동시에, 클로즈업쇼트를 통해 마츠코의 얼굴이 망연자실한 표정에서 점점 일그러져 가는 것을 포착함으로써 마츠코의 분노가 점점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면은 터키탕 입구를 비추고, 터키탕 주인 남자가 마츠코에게 ‘왜?’라고 묻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라는 말을 통해 장소가 방에서 터키탕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뮤직비디오 식으로 전개되는데, 마츠코가 초보 호스테스에서 최고가 되기까지의, 점점 더 물들어가는 과정을 짧은 노래 안에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중간에서 마츠코의 호스테스로서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찍은 파트너와의 2인조 서비스 광고가 크고 화려한 칼라로 신문에 실리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몇 장의 컷 이후 다시 신문에 실렸던 광고의 사진을 흑백으로 크게 클로즈업쇼트로 보여준 다음, 그 흑백 사진이 실린 신문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 마츠코와 파트너의 2인조 광고는 신문 왼쪽 구석에 흑백으로 초라하게 실려 있는 반면 젊고 새로운 호스테스들의 광고가 오른쪽에 크게 칼라로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중에는 ‘능숙한 프로의 시대는 마지막을 고했다’라는 헤드라인을 보여주는데, 이것들은 주제적 몽타주 기법을 통해 시간의 경과와 마츠코의 호스테스로서의 생명이 다해간다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장치인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은 호스테스들의 무대 위 공연으로, 마츠코 세대의 호스테스들이 빨간 옷을 입고 무대의 앞줄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파란 옷을 입은 젊고 새로운 호스테스들이 앞줄로 나와 마츠코 일동을 무대 뒤로 보내버리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빨간색↔파란색, 한물감↔신선함, 앞↔뒤의 대결구도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한 것이다.

10)마츠코가 다섯 번째 남자인 오노데라를 죽이게 되는 장면에서는, 방은 바닥의 카펫, 발코니, 카펫에 소파까지 전부 푸른색인 반면, 피로 물든 시체와 살인자인 마츠코 본인은 온통 시뻘겋게 비춤으로써 색채대비를 통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살인과 죽음의 상징으로 쓰인 빨간색은 투신자살을 시도했다가 살려고 다시 발코니를 움켜쥔 마츠코의 붉은 손과 그 옆에 피어있는 붉은 장미꽃의 색으로 쓰임으로써 죽음과 동시에 삶, 삶에 남은 미련과 희망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리고 마츠코가 살려고 발코니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모습을 아이리스 기법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마츠코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Posted by 강지님
영화2009. 4. 4. 16:59


1) 카타히라 나기사, 그리고 TV

영화에서는 반복적으로 영화 속 텔레비전을 통해서 수사드라마를 보여준다. 절벽 끝에 선 절망적인 범인에게 해결사인 ‘카타히라 나기사’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신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어.” 라고 외치지만, 범인들은 절벽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 드라마가 맨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쇼가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장면에서이다. 화면은 자연스럽게 쇼가 마주보고 있는 여자친구의 머리 뒤에 놓인 텔레비전 화면에서 방영되고 있는 그 수사 드라마의 위와 같은 전형적인 틀을 먼저 보여준다. 앞으로 이 드라마를 수시로 일종의 장치로써 등장시키기 위해 초석을 마련해놓은 셈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가 등장할 상황 또한 여자친구에게 한심하다며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것과 같이 절망적이고 시쳇말로 ‘안습인’ 상황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다음으로 드라마가 등장하는 것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쇼가 간 성인비디오 가게 카운터에 있는 TV를 통해서이다. 쇼는 멍한 표정으로 그 드라마를 바라보면서, 카타히라 나기사가 ‘새 삶을 사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난 이후 드라마 속에서 절벽에 서 있는 범인은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아닌, 바로 쇼다. 그리고 TV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쇼는 나기사에게 외친다. ‘무리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쇼가 그 드라마 속에서 벼랑 끝에 선 범인과 같이 절박하고 참담한 심정에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한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인 것이다.

카타히라 나기사 시리즈 말고도 TV는 영화 곳곳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연도를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마츠코가 해고당했을 때는 오일쇼크로 인한 사재기 문제를 보도하는 뉴스를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 중반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마츠코가 히카루 겐지의 팬이 되었을 때는 TV를 통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모습과 일본의 유명했던 엔카가수 미소라히바리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뉴스를 보여줌으로써 그때가 1989년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나중에는 한 때 일본 열도를 강타했던 ‘경단 3형제’노래를 TV를 통해 들려줌으로써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2)마츠코 특유의 ‘엽기표정’

이 표정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위에서 화면전환 부분을 설명했을 때로, 영화의 시작부분이자 영화제목이 뜨는 장면이다. 처음으로 이 표정을 짓게 된 것은 아버지와 둘이서 백화점에 놀러갔을 때로, 옥상의 야외무대에서 아버지와 광대의 쇼를 볼 때 모두들 웃는 중에 아버지 혼자 여동생 쿠미 걱정에 시름에 잠겨 웃지 않으시자 아버지를 웃게 해드리기 위해 광대의 표정을 따라한 것이다. 아버지가 웃으시자 마츠코는 그 이후로 계속 그 표정으로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드리게 된다. 하지만 마츠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결국 마츠코가 성인이 되자 더 이상 그 표정에 웃지 않게 되고,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마츠코는 곤란한 일에 처했을 때 마다 그 표정을 짓게 된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가게주인에게 없어졌던 돈을 돌려줄 때에나, 그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리에서 류의 거짓말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이 표정을 짓게 되는데, 슬프게도 이 표정은 상대방의 화를 부추김으로써 마츠코를 더 곤란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3)백화점 옥상의 야외 공연무대

아버지와 단 둘이서 백화점에 갔을 때 처음 등장하는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들은 주인공들의 심정이나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준다. 가출 후 작가지망생인 테츠야와 살 때 돈을 빌리기 위해 쇼의 아버지인 동생을 만나는 장소 또한 이 야외무대의 객석인데, 테츠야에 대해 마츠코가 ‘재능있고 다정해’라고 말하자마자 공연하는 가수가 ‘그건 거짓말 거짓말’이라며 노래를 부르고, 마츠코가 테츠야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짐으로써 마츠코의 말이 진짜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돈 때문에 호스테스같은 직업으로까지 타락하고 싶지 않다는 말 다음에도 ‘그건 거짓말’이란 가사를 들려줌으로써 그 말 또한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들은 이후에는 ‘어떻게 하면 나 사랑받는 아이가’ 라는 가사가 들려오고, 바로 다음 컷에서 마츠코는 무대 위에 올라 ‘될 수 있는 거야?’ 하고 가사의 끝을 맺으며 함께 노래를 부른다. 쇼가 수사드라마 속으로 직접 들어가 있는 표현과 같이 이 또한 고도의 감정이입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장치인 것이다.

4)까마귀

계속해서 히카루 겐지에게서는 답장이 없고, 좌절해가는 상황 속에서 마츠코는 검은색 비닐봉지더미 위에 앉은 까마귀 두 마리와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까마귀 두 마리는 그녀에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없네’ 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이것은 당연히 실제로 까마귀들이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까마귀를 보고 느낀 마츠코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희망을 점점 잃어가는 가운데 그녀 앞에 놓인 까마귀는 현실과 꿈의 괴리를 깨닫게 해 주는 고도의 상징적인 동물인 것이다. 그 다음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데, 방에 돌아와 수북히 쌓인 검은색 비닐봉지묶음 더미에 마츠코가 몸을 파묻자 비닐봉지들이 까마귀 떼로 변신하게 된다. 이것은 사와무라가 했던 말인 ‘백조를 동경했는데 눈을 떠보니 시커먼 까마귀가 되어 버렸다’와 일맥상통하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마츠코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덧붙여 이것은 마츠코가 영원히 히카루 겐지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하게 될 것과 앞으로도 꿈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란 것을 암시해 준다.


Posted by 강지님
영화2009. 4. 4. 16:55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열번도 넘게 본,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1)~(3)까지 모두 내가 영상예술의 이해를 들으면서 썼던 레포트. 부족한 글이지만 글을 쓰면서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에, 내겐 소중한 글이다. 다시 찾고 싶었는데 우연히 발견해서 또 잃어버리기 전에 여기다 올린다. )

영화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금의 시점에서 이야기로 교차편집 기법을 통해 들려주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특히 그 장면들은 주로 마츠코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타난다. 동생 쿠미에게 사에키 선생과의 일을 들려주는 것이나, 교도소에서 교관에게 시마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그 예이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동화를 연상시킨다. 결국 마츠코는 예쁜 동화 속 여주인공과 같은 삶은 현실에서의 사랑을 통해 꿈꿔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곳곳에서 마츠코의 일생을 동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사와무라의 ‘여자라면 누구나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그런 예쁜 동화를 동경하는 법이라구.’ 란 대사는 관객들에게 마츠코가 동화같이 멋진 사랑을 꿈꿔왔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예쁜 꽃들이 만발한 판타지적 배경들, 애니메이션 새들 또한 사랑에 빠진 마츠코의 동화속 여주인공 같은 심정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환상적 동화의 풍경들은 잔혹하기마저 한 현실과 대비된다. 동화를 꿈꾸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일생은 마지막까지도 환상을 허락하지 않고 ‘급’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남은 희망을 글어 모아 미용사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명함을 주우러 갔다가 동네 어린이들에게 마지막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맞아죽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늘 혼자였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한 쿠미를 더 애지중지하시는 아버지로부터 외로움을 느꼈고, 수차례의 사랑을 했으나 매번 버림받았으며, 생일에는 혼자 쓸쓸히 카페에서 직접 산 조각 케이크로 자축해야 했다. 영화는 또한 마츠코가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들어가서는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여준다.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은 원래 돌아온 사람을 맞아주는 사람이 방 안에 있어야 제대로 성립하는 말이다. 하지만 마츠코에게 그 말을 되받아서 ‘어서와’ 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죽는 날까지 철저하게 혼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녀 개인의 삶은 비참하고 슬픈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녀의 존재는 여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사와무라는 교도소 안에서 흐트러짐이 없는 마츠코를 보고 희망을 얻었으며, AV여배우로써의 삶을 시작하면서 겪은 수치심을 마츠코에게서 위로받는다. 그리고 방탕한 백수생활을 하던 쇼 또한 자신의 고모였던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남들에게 따뜻하고도 사랑스러웠던 그녀의 과거 모습에 위로받는다. 영화가 점점 진행되어 갈수록 마츠코와 쇼가 한 프레임에 자주 같이 담기는 것은 - 실제로 죽은 마츠코가 살아있는 쇼와 같은 프레임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쇼가 마츠코의 삶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고모에게 애정을 갖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쇼와 마츠코의 연결성은 사와무라의 ‘어딘지 모르게 마츠코를 닮았는걸’ 이라는 평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마츠코란 존재의 의미를 어느 무엇보다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단어는 ‘신’이다. 비록 자신은 상처투성이에 버림받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져버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기분을 맞춰드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남자들에게서 사랑받기 위해 그 남자가 원하는 대로 맞춰서 살아간다. 돈을 꿔오라면 돈을 꿔 오고, 함께 미용사로 살고 싶어 미용기술을 배우고,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야쿠자를 말리지 않는 것이 그 예이다. 그야말로 자신을 내던지고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가며 상대방에게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다. 철저히 타자 지향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의 전형인 것이다. 이러한 마츠코의 신과 같은 캐릭터는 류의 말을 통해서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성경구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자가 신이라면, 마츠코야말로 진정한 신이라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의 ‘근원어’라는 개념에서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데에는 나-그것, 나-너의 두 가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전자의 경우가 이해 타산적이고, 물질적, 객관적 관계라면 후자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치고 기울여야만 맺을 수 없는 진정한 ‘관계’이다. 신과 나의 관계는 이 중 후자인데, 다른 모든 ‘관계’들을 포함하는, 영원한 궁극적 관계이다. 마츠코야 말로 신과 같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어가며 남을 사랑한 존재였다. 그녀는 진정한 나-너의 관계를 꿈꾸며, 자신 또한 남에게서 그러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왔던 것이다. 비록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녀와는 달리 그녀를 나-그것의 관계로 ‘대상화’하여 매번 버림받고 상처입어 왔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남을 용서하고, 또 사랑해주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궁극적 사랑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충분히 ‘혐오’스럽다. 집에서는 동생에게 치여 제대로 사랑받기 못하고, 커리어는 중학교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에서 호스티스라는 밑바닥까지 추락해 버렸으며,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매번 버림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른, 암울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 속으로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바라보면, 그 안에는 넘치는 희망과 사랑, 그리고 꿈이 있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개구리 소년처럼,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에 대한 기대를 먼저 져 버리지 않고, 매번 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남에게 전파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마치 남을 깨끗하게 닦아줄수록 자신은 점점 너덜너덜해지고 더러워지는 걸레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은 다른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사랑스럽고, 빛나고, 멋지다. 쇼가 말한 대로 인간의 삶이 남에게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닌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느냐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라면, 마츠코의 삶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었으니까.


Posted by 강지님
영화2009. 4. 4. 16:40

 (예전에 썼던 글인데 여기에 다시 올린다. 그냥..)

#이 영화의 전편이라는 '도그빌' 을 보기도 전에 접한 '만덜레이'.

영화는 화면을 가득 채운 하얀색 미국지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지도 위를 달리는 네 대의 차들.

처음 차들이 클로즈업 되었을 때 나는 하얀색 바탕의 미국지도가 하얗고 뽀얀 먼지 가득한 길로 변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속으로 '참 멋진 화면전환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건 내 착각이었다. 등장인물들이 발딛고 서 있던 땅은 여전히 지명 이름이 쓰여진 지도 그대로였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마치 연극의 무대장치와 같은 곳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그렇다고 그 지도의 범위가 넓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완전 간단화된 작은 농장 안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 이런 화면 구성이 낯설었지만, 한번 적응하고 나니 쉽고 간단해서 편했다.

 

##미흡하지만, 내가 낀 안경빛 만덜레이 -

+ 시작과 끝을 장식한 회초리

그레이스가 만덜레이에 도착해 처음으로 한 행동은 '회초리를 빼앗는 것' 이었다. 그녀는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된 지 70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예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이 곳 만덜레이의 모습에 분노하고, 회초리를 빼앗으면서 노예들의 '해방'을 다짐한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가, 그로부터 1년 뒤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다시 자신이 빼앗았던 회초리를 다시 쥐고 그녀 자신이 해방시켰던 '노예'를 때린다. '주인'과 같은 위치에서 말이다.

 

처음 그녀가 만덜레이의 '여왕'과 같은 존재로 주인집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하고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서 농장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만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거느리는 갱단의 힘, 무기로 상징되는 '힘' 또는 '폭력' 덕분이었다. 여기서 떠오른 것은 '군사혁명이론'. 물론 군사력의 변화라는 요인 하나가지고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꽤 매력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나만 해도 어렸을 때 계속 엄마 말을 안듣다가 나중에 매 한 대 맞고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그제서야 말을 들은 적이 여러번 있었으니까 말이다. 평화를 위해서랍시고 각 나라마다 군사비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붓는 것도 같은 논리에서려나 -

 

하지만 상대에게 총구를 겨눠 얻어낸 복종은 완전한 복종일 수가 없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결국 마지막에 엄석대가 지는 것처럼. 그레이스가 1년 뒤에 자신이 빼앗았던 회초리로 다시 '노예'를 때린 것은, 결국 농장에서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 아니었을까?

 

+공포의 다수결 법칙

흑인들에게 그레이스는 수업이라고 하여 '민주주의'에 대해서 가르친다. 그녀가 지금껏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던 흑인들에게 '이것이 민주주의'라며 시행하게 한 시스템은 바로 '다수결의 원칙'이었다. 한 사람이 어떤 문제를 제기하면, 각자 찬성과 반대에 손을 들어 더 많은 쪽의 의견을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름 합리적이라는 우리의 '다수결의 원칙'님은 삐걱이게 된다. 그레이스와 같은 침대를 쓰던 할머니 흑인이 폐렴에 걸린 아이의 음식을 몰래 빼앗아 먹어 결국 아이를 죽게 했다며, 아이의 아버지는 그 할머니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찬성. 결국 그레이스는 자기가 도입시킨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 결과때문에 자기 손으로 그 할머니를 죽이게 된다. '소수나 약자의 의견도 들어주어야 한다'는 외침은 공허해지고, '민주주의'는 한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농장에서의 표준시간 또한 이 '다수결'에 의해 지어진다. 예를 들어, 원래 시간이 7시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7시 15분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 시간은 7시 15분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그레이스는 아버지와 약속한 시간에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레이스가 농장을 떠나려고 했을 때, 흑인들은 그녀를 가지 못하게 막는다. 자신들끼리 '투표'한 결과 만장일치로 그녀가 옛 여주인과 같은 역할을 계속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면서.

 

결국 종합하자면, 불쌍한 그레이스는 자신이 도입시켰던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자기 손으로 원하지도 않는 살인을 해야 했고, 아버지 일행에 합류하지 못했으며, '여주인' 역할을 명령받게 된 것이다.

이런 걸 '자승자박'이라고 해야하나.....?

 

+반전, 반전, 반전... 그 책을 쓴 게 누구라고??!

만덜레이에는 '여주인의 책' 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노예생활백서'정도가 되겠다. 그 책 안에는 농장에서의 모든 생활 규칙이 적혀 있었다. 몇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언제 일하고 잠을 자는지와 같은, 노예들의 생활을 규정하는 내용들 말이다. 특이한 것은, 각 노예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져 있고, 그 번호에 따라 노예들의 성격유형이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1번은 자긍심과 주체성이 높은 노예, 7번은 매우 교활한 노예... 이런 식으로.

그레이스는 '티모시'를 1번 노예로 생각하며, 그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와 잠자리까지 함께하게 되지만, 나중에서야 티모시가 1번이 아닌 7번, '교활한 노예'라는 걸 알게된다. 티모시를 향한 마음이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그녀의 눈이 '1'을 '7'로 보길 거부했었단 것도.

격분한 그녀는 농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떠나는 길에 '충격적일 수도 있어요' 라며 그 책을 흑인들에게 선물이라며 건넨다. 하지만 웬걸, 그 책은 흑인들에게 전혀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냐면 그 중 한명이 바로 그 책의 공동 집필자이고, 상위랭크의 다른 흑인들 몇명 또한 그 책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레이스도, 나도, 그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멍해져 있었다. '어떻게 스스로 노예로 지내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거지? 자유는 좋은 거잖아! ' 그레이스의 지난 1년이 헛된 것이었다고 판명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에 영화 '판의 미로' 에서 입가에 미소를 띈 채 죽은 오필리어와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양반이 되질 않겠다던 부자가 떠올랐다. '객관적 부정적 현실을 주관적으로 긍정하고 행복하다 느낀 것'과 (물론 양반들의 위선이라는 주제와는 동떨어진 듯한 해석같지만) 양반이 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분명 객관적으로 노예제도는 폭력과 억압의 제도이며, 없어져야 할 나쁜 제도이다. 하지만 노예로 살아왔던 만덜레이의 흑인들은 '자유인'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노예이기를 자처한다.

이 엄청난 모순을,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만 같은 답답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티모시의 마지막 대사가 총알처럼 날아와 박힌다. 'You made us.'

어쩌면 그것은, 말로는 노예제도를 없앴다면서도 자유인이 된 흑인들을 여전히 억압하고 차별했던, 도대체 노예였을 때보다 더 좋은 게 뭔지 헷갈리게 했던 백인중심적 사회를, 그리고백년도 더 지난 지금 여전히 곳곳에서 'ing'인 인종차별을 향한 것이었을지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배경이 되었던 KKK단과 마틴 루터 킹Jr.의 사진들도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이었을까.

 

###이렇게 부족하게나마 글로 옮겨적은 다음에도 시원하지 않다. 오히려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단편적인 감상들과 느낌들을 줄줄이 이어서 글로 '구체화'하려다 보니 더 답답해진 기분이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어렵다.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마지막 헛소리_

영화 포스터의 그레이스가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왜 표정처리를 저렇게 했지?

포스터부터가 알 수 없게 만드는 영화.

 


Posted by 강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