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동시에 몰려오는 이 아쉬움은 뭘까. 아마도, 여행기까지 다 써버리고 나서야 내 여행이 진짜 끝날 것만 같아서가 아닐까. 여행기를 쓰기 위해 수십장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고 그 중에 괜찮은 것들을 골라가면서, 그 사진 한 장이 담기기까지의 일들을 떠올리는 게 참 재미있었는데. 한 달 전쯤의 일들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해나가며 다시 그 곳 거리들을 누비고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정말 재미있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암튼, 1월 8일 오후, 유진이랑 헤어지고 나서 나는 짐 톰슨 하우스까지 씨암패러곤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캐리어를 끌고 가야 해서 그렇지 그리 머지 않은 길에 계단도 별로 없는 길이라 가는 길은 수월했다. 운하를 건너는 다리가 나타날 때 까지 걷다가 그 운하를 따라서 조금만 걸어가면 끝.
그리고 제 때 시작된 영어 가이드 투어. 가이드는 심한 태국식 영어를 구사했지만,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실내에서는 안타깝게도 사진을 찍을 수 없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가방을 사물함에 보관해 두어야 한다. 가방까지 보관해 두어야 하나 싶어서 처음엔 어리둥절했었는데, 안에 들어가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짐 톰슨 하우스 내의 아주 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식품들은 유리관으로 보호되어 있지 않은 채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아유타야에서 가져온 불상을 비롯해서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물건들이 한두가지가 아닌데도 말이다. 누군가 나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져갈 수도 있는 상황.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에 부득이하게 가방을 맡기도록 하고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짐 톰슨이란 사람은 태국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존경을 받는 외국인 중에 한명이라고 한다. 군인 신분으로 태국에 왔다가 그 매력에 빠져서 이 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 특히 태국 실크의 아름다움에 반해 실크의 질 개선과 상품화에 주력했고, 덕분에 오늘날의 태국산 실크가 명성이 자자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집에서 10년도 채 살아보지 못하고 행방불명 되었다는 사실도 그를 더 유명하게 하는 데 한 몫 했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
짐 톰슨 하우스를 구경하고 나서는 무엇을 할지 결정하기 위해 한인 여행사에서 공짜로 얻어온 지도를 펼쳐보다가, 마침 운하 주변에 마사지샵이 하나 있길래 가서 마사지나 한 번 더 받기로 결심했다. 한국 가면 언제 이렇게 마사지를 받아보겠는가. 내가 찾아간 마사지샵은 P.Pleon이란 곳으로, 고급스러운 마사지샵은 아니지만 나름 가격대비 실속을 자랑하는 십년이 넘은 마사지샵이었다. 1시간짜리 발마사지를 하면 머리와 어깨마사지도 서비스로 해준다길래 그걸로 선택했다. 편한 마사지 의자에 앉아 먼저 차를 한 잔 대접받고, 시원한 젤을 발라가며 하는 마사지를 받으니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그래, 역시 마지막 날에는 이런 마사지가 제격이지. 그동안 너무 많이 걸었고, 너무 무거운 짐을 들어왔으니까. 가격도 그렇게 차이 나지 않는데 카오산의 길거리 마사지보다 훨씬 실력있고 좋았다. 덕분에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오는 줄도 모르고 반쯤 졸면서 정말 편한 한시간을 보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태국식 마사지를 받아보고 싶다면 망설임없이 추천.
아직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고, 거대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지를 정도의 돈은 없었던 데에다 조금 피곤했으므로 나는 카페에 들어가서 조금 쉬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도 한국인 사이에서 입소문난 가게들만 표시되어 있는 지도를 펼쳐보다가 망고로 만든 디저트 전문점이라는 '망고탱고'에 가 보기로 했다. 씨암스퀘어쪽. 근데 아무리 찾아봐도 가게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지도상으로는 이 쯤에 있어야 하는데. 한참을 헤맨 뒤에야 그 쪽이 최근에 화재가 나서 한 블럭 내에 있던 가게들이 통째로 당분간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망고 정말 먹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달래면서 또 어디에 가 볼까 하다가, 지도상에도 표시되어 있고, 방콕 현지 젊은이들로 바글거렸던 '밀크플러스'란 가게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현지인들에게 인기있는 가게 치고 실패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밀크플러스는 가게 이름에 걸맞게 우유를 파는 가게였다. 그것도 그냥 흰 우유만 팔지 않고 저지방 우유, 단맛을 가미한 우유, 석류맛, 초코맛, 딸기맛, 망고맛 등등 다양한 맛의 우유들이 한가득. 우유 뿐 아니라 그 우유들로 만든 쉐이크 음료들도 많았고, 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는 각종 토핑을 얹은 토스트들이 있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석류맛 우유쉐이크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가격은 60밧. 카오산로드에서 수박주스를 20밧에 사 먹은 것에 비하면 착하지는 않은 가격이다. 수많은 현지인들 속에서 외국인은 나 단 한명. 나는 주문한 쉐이크를 받아다가 가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홀짝이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정하고 일기를 쓰면서 휴식을 취했다. 방콕의 젊은이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고.
밀크플러스에 나와서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씨파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역시 씨암 스퀘어 쪽에 있어서 밀크플러스에서 그닥 멀지 않았다. 영어 메뉴가 있긴 하지만, 몇가지 주요 메뉴들만 소개한 것 뿐이어서 살짝 아쉬운 감이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태국어를 알 길이 없는데. 결국 영어 메뉴에 소개된 것 중에서 예산에도 맞고 맛도 있어 보이는 계란과 햄을 넣은 국수를 주문했다.
저녁을 실컷 여유부리며 먹고 나서는 칼립소 쇼가 열리는 아시아 호텔로 이동하기로 했다. 씨암에서는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 그냥 걸어가기로. 어짜피 전철역 구간이 우리나라보다 짧기 때문에 걸을 만 했다. 다만 좀 많이 어두컴컴하고 인적이 드물었다는 게 문제지....
그리고 드디어 쇼가 시작되었다. 트랜스젠더들이 약 한시간 동안 펼치는 너무나도 유쾌하고 신나는 카바레. 팝송이나 뮤지컬 넘버, 아시아 전통 노래 등에 배우들이 립싱크를 하며 연기를 펼치는 쇼인데, 어쩜 그리도 입이 가사와 딱딱 맞아떨어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 수많은 외국어를 다 구사하는 건 절대 아닐텐데. 그 프로정신에 한 번 놀라고, 화려한 무대에 또 한 번 놀라고, 여자인 나보다 더 예쁜 트랜스젠더들의 외모에도 놀라고. 놀라움과 화려함의 연속인 공연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칼립소 쇼에서의 사진들이 이어집니다. 감상하시길.
사진이 좀 많으니 스크롤 압박도 사전에 양해를 구합니다.
벌써 한시간이나 되었단 말이야, 싶을 정도로 공연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너무나도 흥겨웠고, 화려하고, 재미있었다. 화려한 공연의 막이 내림과 함께, 나의 방콕 시내에서의 일정도 막을 내렸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을 향해 떠나야 할 시간.
나는 아시아 호텔이 있는 랏차테위 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파야타야 역까지 걸어갔다. 그 역에서부터 운영되는 에어포트 레일을 이용하기 위해서.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가도 350밧밖에 하지 않지만, 수중에 그정도의 돈도 없고, 무엇보다도 훨씬 더 저렴한 40밧의 가격에 공항까지 빠르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공항 철도를 이용했다. 또한 덕분에 여행 중 새로운 교통수단을 이용해 보는 재미도 누릴 수 있고 말이다. 티켓을 사기 위해 40밧을 내미니 손에 빨간 동그라미 모양의 전자칩이 박힌 토큰이 주어졌다. 카드도 아니고 토큰이라니. 도심을 떠나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은 재미를 안겨주는 방콕이었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간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기 위해 안내판을 보는데 세상에,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타야 하는 비행기가 무려 한시간 반이나 연착된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원래 방콕 현지시각 새벽 1시 55분에 뜨는 비행긴데... 새벽 세시가 넘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짜증났지만, 자칫하면 상하이에서 연결 항공편을 타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날 더 아찔하게 했다. 예정대로의 상해에서의 대기시간이 2시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삼십분 내에 상해공항에서 트랜스퍼를 할 수 있을까? 나 한국에 내일 도착할 수 있긴 한걸까? 체크인을 위해 오랜 시간 긴 줄을 서며 기다리면서 온갖 상상을 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담당 직원에게 물어보니 상해 공항 사정상 연착이 된 거라면서 도착하면 최대한 제 때 환승편을 탈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줄거라면서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자기로썬 확답은 줄 수 없다곤 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 내 잘못도 아니잖아. 만약 비행기를 놓치게 되면 그 다음편 비행기를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해서 태워주거나, meal ticket이라고 한 장 주지 않겠어,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벽 세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까지 납득한 건 아니었다. 수중에 있는 돈도 다 떨어졌고, 숙면을 취하지 못한 채로 여행 막바지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닌 탓에 지쳐있었을 뿐더러, 겨울 옷 한 벌 없던 내게 새벽 세시 반까지의 기다림은 너무 가혹했다. 게다가 공항 대기실은 겨울인 나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 방콕답지 않게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적어도 방콕 공항에서만큼은 따뜻하게 있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덕분에 새벽 세시 반까지 나는 공항 의자에서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추위에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아, 돈 많이 벌면 환승항공기는 절대 타지 말아야지.
마지막 순간까지 공항에서 추위에 떨며 체력을 소비한 나는, 마침내 도착한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완전히 골아떨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도 느끼지 못하고 잠들었으니, 내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륙하는 순간도, 음료도, 기내식도 모두 놓치고 나는 정말이지 거짓말 안하고 상해에 착륙할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sleep like a log'를 몸소 체험했달까. 비행기 창 밖으로 방콕을 내려다보며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은 결국 연출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영상 30도의 나라에서 다시금 영하 16도의 나라로 돌아왔다.
참 많은 것을 보고, 먹고, 경험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만원 한 장 빌리지 않고 모든 여행 경비를 내 돈으로 지불한 여행,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떠나서 혼자 돌아온 여행,
싱가폴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가 본 동남아 여행,
처음으로 우리나라와 계절이 다른 곳으로 떠난 여행,
뚝뚝부터 수상버스까지 거의 모든 교통수단은 다 이용해 보고,
여러 번 국경을 넘고 중국에서 환승까지 하느라 한 번의 여행으로 무려 열 개의 도장을
여권에 남길 수 있었던 여행.
대학교 새내기 시절부터 가슴 한켠에 로망으로 간직해 두고 있던 카오산에 내가 서 있었고,
말로만 듣던 메콩강을 직접 내 두 눈으로 가득 담기도 했다.
꿈이 현실이 되고, 사진 속 풍경이 눈 앞의 실체가 되는 황홀한 경험.
남들에게 아직은 낯설고 친숙하지 않은, 그만큼 다른 나라들에 비해 때가 덜 묻고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라오스를, 더 변해버리기 전에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복이었다.
아직까지도 공동체적 생활을 구현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나가고 있던 그들의 모습, 그들의 일상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에 온몸이 짜릿하게 울릴 정도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아직 더 배우고자 하고 꿈꾸고 싶어하는 스물 넷 내 젊은 나이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의 한 순간에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거대한 한 획을 그은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멋진 여행의 순간을 함께 해준,
카메라로, 두 눈으로 그 감동의 순간에 서 있는 나를 담아준,
여행의 동반자였던 유진이에게 무한 감사와 애정을 보낸다. 함께해 주어서 너무 고마워 -
'유랑 > 2011 방콕(태국), 라오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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